대가야의 대표 무덤 - 44호분
오랜만에 다시 가야이야기를 이어가볼까 합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주제는 바로 지산동 44호분에 대한 것입니다. 지산동 44호분은 지산동 고분군 중 가장 유명한 고분이며 국내 최대 순장묘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44호분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죠.
1977년 고령군과 문화재관리국(현재의 문화재청)은 대가야문화권의 유적 보존을 위한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지산동 고분군 중 두개의 무덤을 발굴하는데 44호분은 경북대학교가 45호분은 계명대학교가 맡게 됩니다. 금림왕릉이라고도 불리우는, 지산동 고분군에서 가장 큰 고분인 47호분이 있긴 했지만 이미 1939년 일제가 발굴을 가장한 도굴을 이미 자행했기에, 당시 훼손이 매우 심했지만 그래도 규모가 컸던 44호분과 45호분을 발굴하게 됩니다.
일제는 지산동에서 11개의 무덤을 발굴하였다고 알려졌지만 대부분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나오지 않았고, 게다가 47호분 외에는 나머지 10개의 무덤은 아직 어느 위치였는지도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굴을 가장한 도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아무튼 47호분은 봉분의 크기만 49미터에 이릅니다. 묘제가 서로 다르기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봉분 크기만 따지면 동시대 대릉원의 신라 고총들과 그 크기가 비슷합니다. 무덤 주인공의 지배력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석실의 크기가 9.4x1.8미터이고 금동제 호록(화살통), 황어뼈, 금장 환두대도, 이형금동제품, 철촉 30점 등 유물 6500여개가 출토되었고 조선총독부로 보내졌다고 알려졌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환두대도와 화살통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을 뿐 나머지 유물의 소재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2년, 당시 발굴조사의 참여했던 아리미쓰 교이치(마지막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으로도 알려져있죠)가 발굴한지 60년이 지나 간략한 보고서를 내어놓았고 무덤 주인공을 이뇌왕으로 추정했습니다. 일제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김해나 함안 등에서 그 증거를 찾지 못하자 고령 지산동까지 그 마수를 뻗었던 것이죠.
발굴팀은 토층 확인용 트렌치를 남기면서 조심스레 발굴을 시작하였습니다. 두 무덤 모두 한가운데 유해와 부장품을 안치하려고 만든 큰 석실(주곽 및 부곽)이 있었고 주곽과 부곽 주변으로 자그마한 석곽이 하나둘씩 차례로 드러났습니다. 소형석곽은 44호분에서는 32기, 45호분에서는 11기가 확인되었습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순장을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했던 첫 사례였습니다. 44호분과 45호분의 발굴 결과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 중심의 한국 고대사에서 가야, 그 중에서도 대가야를 재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44호분의 위치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44호분은 비교적 넓고 평형한 곳에 위치해있는데 주산(해발 310미터)이 경사져 내려가는 끝부분에 걸쳐 있어 다른 고분들보다 유달리 우똑 솟아보이는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게다가 고분의 남쪽은 급경사로 그 밑 지산3리 및 옛날 가야대학교가 있던(지금은 골프장이죠 ㄷㄷㄷ) 평야가 한눈에 보이고, 북쪽으로는 완만하게 45분과 이어집니다. 말로 설명해서는 이해하기가 힘드시겠지만 한번 가보시면 여기 위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단박에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물론 워낙 유명한 무덤이라 주변 정리도 잘 해놓기도 했지만요^^). 참고로 가장 큰 무덤인 47호분은 45호분 바로 위(북서방향)에 있는 무덤입니다.
44호분은 봉분의 크기가 직경 27미터, 잔존 높이 6미터로 상당히 큰 무덤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1기의 대형 주곽, 2기의 대형 부곽(서곽, 남곽)이 그 중심에 있고, 그 주위로 무려 32기의 순장곽들이 부채살 모양으로 호위하듯이 배치되어있습니다. 주곽의 크기는 무려 길이가 9.4미터, 너비 1.75미터, 깊이가 2.1미터였습니다. 성인이 서서 주곽 안을 걸을 수 있는 크기이죠. 순장곽은 크기가 대부분 길이가 3미터 이내이고, 너비와 깊이는 보통 50cm 남짓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다른 가야세력에서는 순장자가 주곽이나 부곽에 매장되는 것과 달리 대가야에서는 주부곽과 독립된 순장곽(순장덧널)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장곽들은 주곽을 호위하듯 방사상으로 배치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지요. 44호분에서는 주곽 및 부곽에서도 순장자과 확인되어 모두 최소 35인 이상의 순장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순장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입니다.
순장된 사람들은 호위무사, 의례관련자, 재산관리자, 마부, 시종, 비첩 등 무덤 주인공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장자에 대한 인골 분석 결과 대부분 노동생산력이 절정인 20~30대로 사후세계에서 이들을 사용하기 위해 데려갔다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망율이 높은 노년층과 유소아층이 적은 것을 볼 때 강제적인 죽음을 당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죠. 그리고 또하나 8~10세 전후의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이는 순장이 가족 단위로도 이루워지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인간제물에 대한 가능성도 배제는 할 수 없긴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까지 44호분의 소형 석곽의 성격에 대해 논쟁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논쟁의 핵심은 과연 소형 석곽이 정말로 순장곽이냐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순장이 성립하려면 3가지 조건이 있다고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동시성, 강제성, 종속성입니다. 동시성이란 피장자의 장례의식에 동반하여 순장자가 매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곽과 순장곽에서 발견된 유물 중 일부가 시대적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에 32개의 소형석곽들이 주곽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죠. 더 나아가 어떤 학자들은 순장이 아닌 배장묘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지요. 상당히 흥미로운 논쟁이지만 세세한 내용은 너무 사족 같아 넘어가도록 하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2007~2008년 지산동 초기 순장묘(프로토타입^^)인 73호분과 75호분의 발굴결과, 주부곽과 소형석곽들이 동시에 조성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확인되었고 이에 대가야 고분의 소형 석곽들이 순장곽이라는 기존 학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이견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너무 세세한 내용이라 이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44호분 역시 여느 가야 고분처럼 도굴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관과 같은 대단한 부장품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가야의 성격을 추정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이목을 끄는 것은 바로 주곽에서 발견된 야광조개국자와 청동합입니다. 야광조개국자는 대형 야광조개껍질을 이용하여 만든 국자인데, 야광조개는 오키나와 열도 남단부에 서식하는 조개입니다. 즉, 가야가 오키나와와 직접 혹은 제3국을 거쳐 교류했음을 짐작해주는 유물이죠. (황남대총, 천마총 같은 신라 고분에서도 야광조개국자가 발견되기도 했죠^^) 그리고 청동합[동완(銅盌)]은 가야 고분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물인데 지산동 44호분에 발견된 청동합과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형태가 비슷하여 대가야와 백제의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대가야와 백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언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또 엄청나게 방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리고 순장곽에서도 다양한 부장품이 발견되는데 긴 칼, 화살촉(11호 순장곽), 마구류 일괄(25호 순장곽), 그리고 순금제 귀고리, 금반지, 은반지 등이 발견되어 순장자의 신분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지산동 44호분은 언제 만들어진 무덤일까요? 지산동에 있는 수백개의 고분들의 축조 순서에는 어떤 패턴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 패턴으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무엇일까요? 다음 시간에는 지산동 고분군의 축조 과정과 대가야의 정치발전 양상을 엿볼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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