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바다 - 홍철 없는 홍철팀
앞서 글에서 가야와 철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드렸습니다. 어찌보면 지금 대한민국의 반도체와 가야의 철이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이 없는 가야를 생각하기 어렵고, 반도체가 없는 한국을 생각하기 어려우니깐요. 뭐, 가야처럼 반도체를 깔고 사람을 매장하진 않지만요^^;; 하지만 지난 글의 마지막에 ‘가야=철의 왕국’라는 등식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이 하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과연 그 걸림돌은 뭘까요? 오늘은 그 걸림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걸림돌을 살펴보려면 다시 한번 <삼국지> 위지 동이전으로 되돌아가야합니다.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國出鐵]….
음…. 뭐가 걸림돌이냐구요? 바로 이 내용, 나라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입니다. 문제는 바로 가야에서 철 생산이 이뤄졌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가야 세력권, 특히 김해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철을 생산한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야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위정자들 무덤 아래 깔리는 막대한 양의 철정, 그리고 철갑옷, 철제무기 등으로 볼때 가야의 철 소비는 상당한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그리고 가야는 고대 교역료를 통해 철을 기반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렸을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철은 바로 가야라는 나라의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위정자들은 철을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였고 그들의 군대를 철로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철로 한군현과 마한, 왜와 교역하며 막대한 부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뒷받침 해줄만한 채광이나 제철 유적, 즉 철광석을 채취하고 그 것을 이용하여 철을 생산하는 시설이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도체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공장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많은 가야사 학자들이 가야의 제철 관련 발굴에 목이 메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관련 유적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김해 퇴래리 유적입니다. 퇴래리 유적에서는 철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무덤에서는 장인이 사용한 망치와 집게 등의 도구와 환두대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즉 철기를 만드는 장인의 신분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철 생산의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퇴래리 유적의 장인은 지금으로 따지만 반도체를 이용하여 전자제품을 만드는 엔지니어 쯤 되니깐요.
그리고 2007년 김해 여래리 및 하계리 유적이 발굴됩니다. 이 일대는 철 생산의 원료인 주산안산암이 분포하는 곳으로 제철과 관련된 슬래그가 출토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문제는 여래리 같은 경우는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제련로가 확인되지 않고, 시기 또한 금관국의 세력이 약해진 5세기 중반부터 6세기에 추정하고 있습니다(물론 4세기 대 유구도 있는 것으로 추정은 하고 있긴 합니다). 하계리 유적에서는 제련로가 발견되긴 하지만 그 시기를 5세기 정도 추정하고 있습니다. 3세기 후반부터 덩이쇠가 무덤에 깔리기 시작하는데 지금까지 발견되는 제철 유적은 시기가 너무 늦죠.
그러다가 드디어 2009년 창원 봉림동에서 4~5세기로 추정되는 제련로 및 제철 관련 유구가 확인되었고, 드디어 가야시대 제철유적을 찾았다고 언론에서도 크게 다룬 바가 있습니다. 다만 제련로가 그 넓은 유적 내에 1개만 발견되어 대량생산에 대한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관련기사: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90410000264
그에 비해 백제와 신라의 제철유적은 잘 확인이 되어있습니다. 일단 백제는 진천 석장리, 충주 칠검동 등에서 제철 유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특히 충주 칠검동 유적 같은 경우는 충주가 일단 양양, 울산과 함께 3대 철광석 산지로 꼽히고 있으며 한성백제기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4세기 유적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도 그 유명한 울산 달천광산에서 기원전 1세기부터 채광이 이루워지고 있음이 확인되었지요. 양산 물금 지역에도 제철 유적이 확인되며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제철 작업이 이뤄졌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금 지역이 신라와 가야의 국경지역이라 이것이 신라의 것인지, 가야의 것인지 아직도 논란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라의 것이라는 것에 한표를 던집니다^^)
결론적으로 현재까지 확인되는 가야의 제철 관련 유적은 빨라봤자 4세기 이후이며, 출토되는 철기의 양에 비해 대규모의 유적 및 유구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런 점을 근거로 가야가 철의 주 생산지가 아니라 소비지로 이해하는 견해도 제시되었습니다. 즉,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철기를 김해로 가져오는 일종의 집산, 소비지로 보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김해, 즉 ‘철의 바다’는 철을 생산 하는 곳이 아닌 철이 모여서 널리 퍼지는 유통의 바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철의 생산은 비교적 후대에 소규모로 이뤄졌다고 주장해볼 수도 있습니다. 즉 4세기 전까지 금관국은 철을 주로 소비하거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개무역을 하는 곳이었다가, 5세기 초 금관국의 힘이 급속히 약해지고 신라의 힘이 강해지는 시기에 제철 기술이 신라에서 가야로 넘어갔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삼국사기에 유달리 신라와 가야의 충돌이 많은데 그것이 울산 달천이나 양주 물금 같은 철생산지 쟁탈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을까 상상을 나래를 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게도,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닌 신라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변진과 진한의 내용이 서로 섞여있고, 우리가 변진의 내용이라고 알고 있는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로 시작하는 이 내용은 실제로는 진한(신라)의 내용이며, 울산의 달천 광산을 가지고 있는 신라가 진정한 철의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가야의 권역에서 대규모 제철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긴 하겠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관련 기사: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1090600001#c2b
과연 가야는 홍철 없는 홍철팀, 즉 철 생산도 못하는 반쪽짜리 철의 왕국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말 진정한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닌 신라였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앞으로의 발굴 및 연구 성과를 기대해보며 글을 마칩니다. 다음에는 가야의 순장에 대해 짚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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